핵심 한눈에

1388년 요동 정벌에 나선 이성계와 조민수의 군대가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향했다. 원정군은 최영을 몰아내고 우왕을 강화로 내보냈으며, 이 정변은 4년 뒤 조선 건국으로 이어진 권력 교체의 출발점이 되었다.[1][4]

날짜 읽기

1388년 음력 5월 22일 · 회군(고려사절요)[1][4] · 원문 역법을 유지했습니다. 양력으로 환산하지 않았습니다.

01

철령위 통보와 요동 정벌

원이 쇠퇴하고 명이 요동으로 세력을 넓히면서 고려와 명의 사이는 갈수록 나빠졌다. 1388년 명이 철령 이북을 직접 관할하겠다며 철령위 설치를 알려 오자, 우왕과 최영은 요동을 치기로 했다. 수문하시중 이성계는 반대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 여름철의 군사 동원, 그 틈을 노릴 왜구, 장마철에 활의 아교가 풀리고 병이 돌 위험을 이유로 들었다. 흔히 4불가론이라 부르는 이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최영이 팔도도통사, 조민수가 좌군도통사, 이성계가 우군도통사를 맡아 원정군이 편성되었다.[1][5]

02

평양에서 위화도까지

좌우군은 음력 4월 18일 평양을 떠났다. 좌우군 3만 8천여 명에 보조 병력을 더하면 5만 명을 조금 넘었지만, 밖으로는 10만 대군이라 일컬었다. 『고려사』는 5월 7일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에 머물렀으며, 달아나는 병사가 길에 줄을 이어 목을 베어도 막지 못했다고 적는다. 장맛비로 강물이 불어 더 나아가기 어렵게 되자 두 도통사는 철군을 청했으나 우왕과 최영은 들어주지 않았다. 『고려사절요』는 5월 22일 을미일 기사에 이성계가 장수들을 설득해 군사를 돌린 장면을 싣는다.[1][5][2][4]

03

개경 장악과 왕조 교체의 시작

회군 소식을 들은 우왕은 서둘러 개경으로 돌아왔지만 원정군을 막을 힘이 없었다. 원정군은 음력 6월 1일 개경 근교에 이르렀고, 최영이 이끈 수비군을 꺾은 뒤 그를 고봉현으로 귀양 보냈다. 6월 8일 우왕은 강화로 쫓겨났다. 회군을 함께 이끈 두 사람은 좌시중과 우시중에 올랐지만 다음 임금을 두고 갈라섰다. 조민수 쪽이 우왕의 아들 창왕을 세우자, 이성계 세력은 토지 제도 개혁을 내세워 경쟁자를 밀어내고 뒤이어 공양왕을 옹립했다. 1392년 이성계가 군신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면서, 위화도 회군은 왕조 교체의 발단으로 기억되었다.[1][5]

04

회군은 언제부터 정변이었을까

회군을 결정한 날짜부터 자료마다 표기가 다르다. [기록 차이] 『고려사』 열전은 이성계가 장수들을 설득하는 기사의 일자를 밝히지 않고 5월의 일로만 두는 반면, 『고려사절요』는 같은 장면을 5월 22일 을미일에 놓는다. 이 문서는 날짜를 명시한 절요를 따르면서, 평양 출발부터 우왕이 개경을 떠나기까지 두 달이 채 안 되는 과정을 하나의 사건으로 본다. [학설]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릴 때부터 이성계가 새 왕조를 열 생각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원정 전부터 반대했고 철군 요청을 거듭했으며, 주변에는 이 기회에 그를 왕으로 세우자는 사람도 있었다. 결과가 조선 건국이었다고 처음의 의도까지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다.[3][4][5]

함께 읽는 말

이 문서의 뜻풀이 · 위 본문과 출처에 근거한 편집 설명

도통사
여러 원수를 거느리고 군대를 지휘하는 직책. 원정군에는 좌군과 우군의 도통사가 따로 있었다.[1]
철령위
명이 철령 이북의 주민을 직접 관할하겠다며 고려에 설치를 통보한 기구.[1]

궁금한 점

위화도는 어디에 있나요?

의주 부근 압록강 하류에 있는 섬이다. 원정군은 강을 건너 이 섬에 머물다가 되돌아섰다.[1][2]

4불가론은 무엇인가요?

요동 정벌에 반대하며 이성계가 든 네 가지 이유다.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 여름철 동원, 왜구 침입의 우려, 장마철의 무기 손상과 전염병을 꼽았다.[1][5]

위화도 회군으로 곧바로 조선이 세워졌나요?

바로 세워지지는 않았다. 회군 뒤 창왕과 공양왕이 차례로 즉위했고,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것은 1392년이다.[5][1]

회군 날짜 5월 22일은 확정된 날짜인가요?

고려사절요가 적은 음력 날짜다. 고려사 열전의 해당 기사에는 일자 표기가 없어, 이 문서는 근거를 밝혀 두 기록을 함께 적는다.[4][3]

TRACE THE RECORD

출처와 더 읽기

  1. 위화도회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확인 2026-10-16

    철령위 통보와 요동 정벌, 4불가론, 4월 18일 출진·5월 7일 위화도 도착·5월 22일 회군, 6월 1일 근교·6월 3일 진입·6월 8일 우왕 축출, 병력 5만 464명

  2. 고려사 열전 권제50, 우왕 14년 5월 — 정벌군이 위화도에 진지를 구축했으나 탈영병이 속출하다국사편찬위원회 고려시대 사료 DB · 확인 2026-10-16

    음력 5월 7일 경진 압록강 도하·위화도 주둔, 탈영병 속출

  3. 고려사 열전 권제50, 우왕 14년 5월 — 이성계가 회군을 결심하고 장수들을 설득하다국사편찬위원회 고려시대 사료 DB · 확인 2026-10-16

    회군 결심 기사의 일자 표기 미상(음력 5월)

  4. 고려사절요 권33, 우왕 14년 5월 —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다국사편찬위원회 고려시대 사료 DB · 확인 2026-10-16

    음력 5월 22일 을미 회군 기사

  5. 한국사 연대기 — 위화도회군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확인 2026-10-16

    명과의 갈등 배경, 4불가론, 좌우군 38,830명·겸군 11,634명·대외 10만, 5월 7일 위화도·5월 22일 회군, 창왕·공양왕 옹립, 회군 당시 왕조 개창 의도 불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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