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한눈에

1960년 4월 19일, 3·15부정선거와 이승만 정권의 강압에 항의하는 학생과 시민이 서울 도심을 메웠고 경무대 앞에서 경찰이 총을 쏘았다. 2월 대구 고등학생 시위에서 시작해 마산을 거쳐 번진 저항은 4월 25일 교수단 시위로 다시 불붙었고, 이승만은 4월 26일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1][3]

날짜 읽기

1960년 4월 19일 · 서울 학생·시민 시위와 경무대 앞 발포[1][3] · 지역 연결: 서울 (국회의사당·경무대 앞 시위와 발포), 마산 (3·15 마산 시위와 김주열 시신 발견 · 지역 코드는 현재 창원 기준)

01

3·15, 미리 짜 둔 부정

1959년 이승만은 앞서 밝혔던 불출마 의사를 뒤집고 네 번째 대통령 선거에 나서겠다고 했다. 내무부 장관 최인규는 일선 경찰서장을 연고지 중심으로 다시 배치하고, 투표의 4할을 미리 넣어 두는 사전 투표, 3인조·5인조로 묶어 서로 감시하게 하는 공개 투표, 완장 부대 동원, 야당 참관인 쫓아내기 같은 방법을 지방 기관장들에게 은밀히 내려보냈다. 1960년 2월 15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병으로 숨지면서 이승만의 당선은 사실상 정해졌고, 승부는 대통령직 승계권을 가진 부통령 자리로 옮겨 갔다. 민주당은 3월 3일 이 부정선거 계획을 폭로했지만 선거는 그대로 치러졌다. 개표에서 득표율이 95~99%까지 나온 곳이 잇따르자 자유당은 숫자를 낮추라고 지시했고, 최종 집계는 이승만 88.7%, 이기붕 79%였다.[2][3]

02

대구의 고등학생, 마산의 바다

첫 시위는 선거 전인 2월 28일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일으켰다. 우리역사넷은 이 2·28대구민주운동 뒤로 대전·서울·부산 등에서도 고등학생이 주도한 시위가 이어졌고, 학원의 자유와 공명선거가 주요 구호였다고 전한다. 선거 당일 마산에서는 시민과 학생 수천 명이 거리로 나섰고, 저녁 개표가 시작된 뒤 다시 모인 시위대를 향해 정전 속에서 경찰이 총과 최루탄을 쏘았다. 4월 11일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고등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르자 분노한 시민들이 다시 일어섰다. 이승만은 4월 15일 마산의 시위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조종된 것이라는 담화를 내 오히려 학생들을 자극했다. 4월 18일에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시위를 마치고 돌아가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정치깡패들에게 습격당했고, 이 소식은 다음 날 아침 신문에 크게 실렸다.[3][1]

03

4월 19일, 화요일

4월 19일 오전부터 서울의 대학생과 고등학생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국회의사당과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향했다. 경무대 앞에 이른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실탄을 쏘기 시작했고, 분노한 시위대는 도심 곳곳에서 더 격렬하게 맞섰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육군참모총장 송요찬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우리역사넷은 경무대 앞 발포가 이미 오후 1시 무렵에 있었기 때문에 계엄이 그 시각으로 거슬러 적용되었다고 설명한다. 같은 날 부산·광주·인천·목포·청주 등에서도 시위가 벌어져 많은 사상자가 났다. 백과사전은 19일 이후 시위가 연일 이어지는 동안 군대가 유혈 사태를 경계하며 지켜보는 태도를 유지했다고 적는다. 우리역사넷은 이날을 피의 화요일이라는 제목으로 정리한다.[1][3][4]

04

교수단의 행진과 4월 26일

시위 뒤에도 정권은 물러서지 않았다. 21일 국무위원들이 일괄 사표를 냈고, 23일 부통령 장면이 사퇴했으며, 24일 이기붕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지만 이승만은 자유당을 떠나겠다는 선에서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흐름을 바꾼 것은 25일의 대학 교수단 시위였다. 교수들은 정권이 3·15부정선거와 4·19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는 시국 선언문을 채택하고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현수막을 들고 행진했으며, 학생과 시민 수만 명이 그 뒤를 따랐다. 이날부터 이승만 퇴진 구호가 본격적으로 나왔다. 26일 오전 이승만의 하야 성명이 라디오로 발표되었고, 국회는 즉시 하야를 담은 시국수습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승만은 27일 사임서를 냈고, 외무부 장관 허정이 과도정부를 이끌었다.[3][1]

05

혁명 이후와 엇갈리는 숫자

과도정부 아래에서 국회는 6월 15일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통과시켰고, 7월 29일 총선거를 거쳐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그러나 부정선거 책임자와 부정 축재자 처리는 다음 정부로 넘어갔고, 3·15부정선거 관련 재판은 이듬해 5·16군사정변 뒤 군사정권으로 이관되었다. [기록 차이] 4월 19일 서울 시위 규모를 백과사전은 대학생과 고등학생 약 3만 명으로, 우리역사넷은 오후 1시 무렵 10만 명을 넘었다고 적는다. [기록 차이] 25일 교수단도 백과사전은 300여 명, 우리역사넷은 시국 선언에 모인 교수 258명으로 적는다. 희생자 수는 이번에 열람한 자료로 확정할 수 없어 이 문서에 적지 않는다. [학설] 백과사전은 이 사건을 혁명으로 볼 수 있는지부터 따지며, 조직된 지도부가 없었던 점이 빠른 하야를 이끌었지만 혁명을 완성하지 못한 원인이 되었다고 본다. 현행 헌법 전문은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밝히고 있다.[3][2][1][5]

함께 읽는 말

이 문서의 뜻풀이 · 위 본문과 출처에 근거한 편집 설명

경무대
이승만 정부 때 대통령 관저를 부르던 이름. 1960년 8월 청와대로 이름을 바꾸었다.[1]
계엄령
비상시에 군이 행정과 치안을 맡도록 선포하는 명령.[1]
과도정부
정권이 바뀌는 사이 임시로 나라를 운영하는 정부.[1]

궁금한 점

4·19혁명은 4월 19일 하루의 일인가요?

우리역사넷은 1960년 2월 28일 대구의 시위부터 이승만이 하야한 4월 26일까지 전국에서 이어진 시위 전체를 4·19혁명으로 설명한다. 4월 19일은 그 가운데 가장 큰 시위와 발포가 있었던 날이다.[3]

3·15부정선거에서는 어떤 부정이 있었나요?

미리 표를 넣어 두는 4할 사전 투표, 3인조·5인조 공개 투표, 완장 부대 동원, 야당 참관인 축출 등이 지시되었고, 개표에서도 득표수가 조작되었다.[2]

4·19혁명은 헌법에도 나오나요?

현행 헌법 전문에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함께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있다.[5]

4·19혁명에는 몇 명이 참여했나요?

하나로 정해진 숫자는 없다. 4월 19일 서울 시위만 해도 백과사전은 약 3만 명, 우리역사넷은 10만 명 이상으로 적는다.[1][3]

TRACE THE RECORD

출처와 더 읽기

  1. 4·19혁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확인 2026-10-16

    4월혁명·4·19의거 이칭, 도시화·교육과 민주 의식, 김주열, 4월 15일 담화, 18일 고려대 피습, 19일 약 3만 명·경무대 발포·계엄, 25일 교수 300여 명, 26일 사임, 허정 과도정부, 혁명 개념 논의와 지도부 부재

  2. 3·15부정선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확인 2026-10-16

    이승만 4선 출마, 4할 사전투표·3인조와 5인조 공개투표·완장부대·참관인 축출 지시, 조병옥 2월 15일 사망, 개표 조작과 하향 조정, 88.7%·79%, 마산 시위, 5·16 이후 재판 이관

  3. 한국사 연대기 — 4·19혁명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확인 2026-10-16

    2·28 대구부터 4·26까지의 시위, 3월 3일 부정선거 계획 폭로, 3·15 마산 발포, 4월 11일 김주열 시신 발견, 18일 고려대 피습, 19일 오후 1시 10만 명 이상·발포·계엄 소급, 25일 교수 258명 시국선언, 26일 하야 성명, 27일 사임서, 6월 15일 개헌·7월 29일 총선

  4. 청와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확인 2026-10-16

    1948년부터 이승만 대통령 관저로 쓰며 경무대라 부름, 4·19혁명에 따른 하야와 함께 이화장으로 옮김, 1960년 8월 윤보선 대통령이 청와대로 명칭 변경

  5. 대한민국헌법 (헌법 제10호, 1987.10.29. 전부개정) 전문국가법령정보센터 · 확인 2026-10-16

    전문에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 계승 명시

4월 19일, DateDB에서 다른 해의 기록 읽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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