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한눈에

612년 음력 7월, 평양 가까이까지 들어왔다가 물러나던 수나라 별동대를 고구려군이 살수에서 뒤쫓아 크게 무찔렀다. 살수는 지금의 청천강으로 본다. 이 패배로 수 양제는 첫 원정을 거두어들였고, 이듬해와 그다음 해의 원정도 철군으로 끝났다.[5][7]

날짜 읽기

612년 음력 7월 · 살수 전투(삼국사기)[5][7] · 원문 역법을 유지했습니다. 양력으로 환산하지 않았습니다.

01

113만 명의 출정과 버티는 성들

612년 정월, 수 양제는 고구려를 치겠다는 조서를 내리고 몸소 군대를 이끌었다. 『삼국사기』는 이때 동원된 병력을 113만 3,800명으로 적으면서, 밖으로는 200만이라 일컬었고 군량을 나르는 인원은 그 두 배였다고 덧붙인다. 두 나라 군대가 요하를 사이에 두고 본격적으로 맞붙은 것은 3월이었다. 4월 중순 강을 건넌 수나라 군대가 요동성을 비롯한 여러 성을 에워쌌지만, 6월 중순이 되도록 성들은 함락되지 않았다. 우리역사넷은 양제가 군대의 진퇴를 모두 자신에게 보고하고 지시를 받게 한 탓에 대응이 늦어졌고, 고구려가 그 틈에 방어를 가다듬었다고 설명한다. 전쟁이 길어지자 수는 성을 우회해 평양을 곧바로 노리는 길을 택했다.[1][7][9]

02

거짓 항복과 일곱 번의 패배

우중문과 우문술이 이끈 9군 30만 5천 명은 압록강 서쪽에 모였다. 출발할 때 사람과 말 모두 100일치 양식에 무기와 장비까지 받아 한 사람이 지는 짐이 석 섬을 넘었고, 병사들이 몰래 양식을 땅에 묻는 바람에 행군 도중 식량이 바닥을 드러냈다. 이때 을지문덕이 거짓으로 항복하러 적진에 들어가 그 형편을 살폈다. 우중문은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위무사 유사룡의 만류로 돌려보냈고, 곧 후회했지만 을지문덕은 돌아보지 않고 강을 건넜다. 추격을 두고 두 장수의 의견이 갈렸으나 결국 수나라 군대는 그를 뒤쫓았다. 을지문덕은 싸울 때마다 일부러 져 주었고, 하루에 일곱 번 이긴 수나라 군대는 살수를 건너 평양성 30리 앞 산자락에 진을 쳤다.[2][3][4][7]

03

살수를 반쯤 건넜을 때

평양성은 험하고 단단했고, 바다로 온 내호아의 수군은 이미 평양성을 공격했다가 크게 패해 합류할 수 없었다.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그만 만족하고 돌아가라는 뜻의 오언시를 보내고, 다시 사신을 보내 군대를 돌리면 왕을 모시고 황제를 뵙겠다는 거짓 항복을 청했다. 지친 군사를 본 우문술은 이를 구실로 철수를 택했다. 수나라 군대는 사방을 경계하는 방진을 짜고 물러났지만 고구려군의 습격이 끊이지 않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7월, 수나라 군대가 살수를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군이 뒤에서 후군을 쳐 장수 신세웅이 전사했다. 무너진 군대는 하루 낮 하룻밤 만에 450리를 달아나 압록수에 이르렀고, 처음 30만 5천 명이던 9군 가운데 요동성으로 돌아간 사람은 2,700명이었다고 한다.[7][9][4][5]

04

첫 원정의 끝과 이어진 침공

별동대가 무너지자 양제는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고 군대를 돌렸다. 이 원정에서 수가 얻은 것은 요하 서쪽의 고구려 거점 무려라를 빼앗아 요동군과 통정진을 둔 것뿐이었다고 『삼국사기』는 적는다. 전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613년 4월 다시 쳐들어온 양제는 밤에 몰래 군대를 거두어 돌아갔고, 614년에는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자 회원진에서 철군했다. 거듭된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는 동안 수나라 안의 혼란도 깊어졌다. 『삼국사기』의 같은 기사는 백제가 수를 돕겠다면서 실제로는 두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도 전해, 이 전쟁이 고구려와 수 두 나라만의 일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5][6]

05

숫자와 사람, 기록이 갈리는 곳

살아 돌아간 수나라 군사의 수부터 자료가 하나로 모이지 않는다. [기록 차이] 『삼국사기』와 『수서』 우문술전, 『자치통감』은 2,700명으로 적지만, 국사편찬위원회 고대사료DB의 역주는 『수서』 양제 본기에 기병 2천여 기, 『북사』 본기에 기병 천여 기로 나온다고 밝힌다. [기록 차이] 날짜도 『삼국사기』 본기는 가을 7월이라고만 적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수나라 군대가 7월 24일 살수에 이르렀다고 서술한다. 이 문서는 원전의 달을 따르고 양력으로 바꾸지 않는다. [학설] 을지문덕이 어떤 집안 출신인지도 알 수 없다. 『삼국사기』는 그의 세계를 모른다고 했고, 『자치통감』에 위지문덕이라는 표기가 있어 선비족 계통 귀화인으로 보는 견해와, 한문 시를 지은 소양을 근거로 새로 성장한 귀족 세력으로 보는 견해가 함께 제시된다.[5][7][8]

함께 읽는 말

이 문서의 뜻풀이 · 위 본문과 출처에 근거한 편집 설명

별동대
본대와 따로 움직이는 부대. 살수에서 무너진 우중문·우문술의 9군이 이에 해당한다.[1]
방진
사방의 적에 대비해 네모꼴로 짜는 진형.[1]
무려라
요하 서쪽에 있던 고구려의 경계 거점.[1]

궁금한 점

살수는 지금의 어느 강인가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우리역사넷 모두 지금의 청천강으로 본다.[7][9]

30만 명 가운데 정말 2,700명만 살아 돌아갔나요?

삼국사기는 9군 30만 5천 명 중 요동성으로 돌아온 이가 2,700명이라고 적는다. 다만 중국 사서 가운데는 기병 2천여 기나 천여 기로 적은 기록도 있어, 이 문서는 숫자를 출처와 함께 밝힌다.[5]

을지문덕이 강물을 막았다가 터뜨렸다는 이야기는 사실인가요?

이번에 대조한 삼국사기 기사와 백과사전, 우리역사넷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원전은 수나라 군대가 강을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군이 뒤에서 공격했다고 적는다.[5][7][9]

살수대첩은 몇 월 며칠에 일어났나요?

삼국사기는 음력 7월로만 적고, 백과사전은 7월 24일 살수 도착을 서술한다. 이 사이트는 원전의 달을 따르며 양력 기념일을 만들지 않는다.[5][7]

TRACE THE RECORD

출처와 더 읽기

  1.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 1월 — 수 양제가 조서를 반포하고 출정하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 확인 2026-10-16

    612년 정월 조서·친정, 병력 113만 3,800명(200만이라 일컬음), 군량 운반 인원은 그 배

  2.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 6월 — 수의 군대가 압록수 서쪽에 주둔하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 확인 2026-10-16

    9군 장수와 압록수 서쪽 집결, 노하·회원진에서 100일치 양식·무기 지급, 1인당 석 섬 이상, 양식을 몰래 묻어 중간에 떨어짐

  3.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 6월 — 을지문덕이 수군 진영의 동정을 살피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 확인 2026-10-16

    을지문덕의 거짓 항복과 정탐, 우중문이 사로잡으려다 유사룡의 만류로 돌려보낸 뒤 후회

  4.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 6월 — 유인전술을 펴서 수의 군대를 공격하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 확인 2026-10-16

    우중문·우문술의 의견 대립, 하루 일곱 번 싸워 모두 이김, 살수를 건너 평양성 30리 지점 주둔, 두 번째 거짓 항복, 방진으로 철수하며 사방에서 습격받음

  5.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 7월 — 살수에서 승리하고 수의 군대가 철군하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 확인 2026-10-16

    가을 7월 살수를 반쯤 건넜을 때 후군 공격·신세웅 전사, 하루 낮밤에 압록수까지 450리, 9군 305,000명 중 요동성 귀환 2,700명. DB 역주: 수서 양제 본기 등은 기병 2천여 기·천여 기로 적음

  6.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 영양왕 24~25년 — 수의 군대가 철군하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 확인 2026-10-16

    613년 4월 양제가 밤에 군대를 돌림. 같은 DB 25년 7·8월 기사(sg_020r_0020_0360·0370): 614년 고구려가 항복을 청하자 수가 회원진에서 철군

  7. 살수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확인 2026-10-16

    612년 7월 살수(지금의 청천강) 전투, 113만 동원·9군 30만 5천, 3월 요하 충돌·4월 중순 도하·6월 중순까지 요동 여러 성 건재, 내호아 수군의 평양성 패배, 7월 24일 살수 도착, 2천7백 생환

  8. 을지문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확인 2026-10-16

    세계 미상, 『자치통감』의 위지문덕 표기, 성씨 해석과 선비족 귀화인설·신진 귀족설 등 출신 논란, 오언시

  9. 한국사 연대기 — 살수대첩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확인 2026-10-16

    113만 3,800명 친정, 양제가 진퇴를 모두 보고받는 명령 체계를 고구려가 역이용, 9군 압록강 서쪽 집결, 을지문덕 정탐·유인, 오언시, 7월 살수 후군 공격, 30만 5천 중 2,7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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